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파엘로 산치오 (문단 편집) == 평가 == 라파엘로의 사망은 흔히 르네상스 절정기의 끝으로 여겨지며 이후 [[매너리즘|마니에리즈모]]를 거쳐 [[바로크 시대]]로 이어진다. 라파엘로는 성실함은 기본에 사교적인 성품도 가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품의 의뢰를 받아 훌륭히 마무리지었다.[* 레오나르도의 깐깐함과 많은 미완성 작품들, 역시 깐깐한 미켈란젤로가 교황 및 추기경과 수시로 충돌하던 모습과 대비되는 라파엘로의 특징이다.] [[르네상스]]의 절정을 이룬 화가답게 그의 그림은 고전 미술의 완성을 보여준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양식으로 흡수하여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재창조를 해내는 기량을 발휘했다.[* 양정무 교수의 글 : '동시대 거장들의 장점을 스펀지처럼 흡수해 통합하고 거기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얹어 작품을 완성한 융합형 천재'] 단정한 선과 형태, 명료한 색상, 기품 있는 인물의 자세 연출, 배치와 구도의 극한에 다다랐으며 고전 미술의 최고 덕목이자 서양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교과서처럼 여긴 '우아한 아름다움(Grazia)'의 원형을 만들었다.[* 곰브리치의 언급이다.] 서정적인 동시에 역동적이며, 회화적으로 풍요로우면서도 조각적인 견고함을 갖추었다고 평가된다. 라파엘로는 또한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를 절정에 올려놓은 동시에 자신이 이룩한 조화, 균형, 안정감을 토대로 한 르네상스 고전주의 회화에 새로운 도전을 했다. '서명의 방'에서 이룩한 그 정점을 '엘리오도로의 방' 작업에서 스스로 파괴하고 새로운 조형적 실험을 시도하며 [[매너리즘]] 양식을 탄생시켰다. 매너리즘이라는 말 자체가 바사리가 한 말에서 유래된 것인데, 고대 이래 미술의 절정은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에 의해 달성되었고 이들보다 더 잘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자신을 포함한 후배 화가들은 이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이 완벽한 미술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하였다. '아테네 학당'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주의 정신[*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되살림.]을 가장 완벽히 구현하였다고 여겨지며 그 이상을 극한으로 끌어냈다. 중앙 집중형의 대칭적 구성, 인물의 상호 관련성과 건물의 구조에서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높게 설치된 돔과 원통형의 궁륭, 거대 조각상이 등장하는 거대한 건물은 레오나르도에 비해 훨씬 복잡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내고 있다. 건물의 기하학적인 정확성과 장대한 공간감은 [[마사초]]에서 시작되어 피에로 델 라 프란체스카, 페루지노를 거쳐온 전통인데 라파엘로가 이 그림으로 완성해냈다. '갈라테아의 승리'에서는 회화적 공간을 연출하는 방법으로 원근법적인 광경보다 인체의 움직임을 사용하여 성공적으로 구현해냈고, '아테네 학당'의 엄숙한 이상주의와는 반대로 고전 문화의 화려함과 감각적인 측면을 부각한다. 독일 미술계의 나사렛 운동(Nazarene movement)[* 그리스도교 미술의 정직성, 영성을 되살리려는 운동]과 [[뒤셀도르프]] 회화 학교의 종교 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스에서는 [[앵그르]]가 나폴레옹이 전리품으로 가져온 라파엘로의 그림들을 보고 평생의 예술 방향을 결정한다.[* 앵그르는 라파엘로를 숭배하다시피 했고 '라파엘로와 라 포르나리나(Raphael and La Fornarina)'라는 상상화를 남기기도 했다. 앵그르의 초상화 작품들도 라파엘로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라파엘로의 작품은 후대의 레퍼런스가 되었으며 1900년대까지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를 능가하는 르네상스 최고의 미술가로 떠받들어지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라파엘로의 명성은 당대부터 8세 연상인 미켈란젤로와 동급으로 여겨졌다. 미켈란젤로 본인은 라파엘로가 죽은지도 22년이 지난 1542년에 쓴 편지에서 '라파엘로가 예술을 알았던 것은 나에게서 배운 것이기 때문'[* '율리오 교황과 나 사이의 모든 불화는 브라만테와 라파엘로의 질투 때문이다. 이들이 나를 망치기 위해 교황에게 그의 무덤 프로젝트를 미루게 했다. 라파엘로는 나를 질투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예술을 알았던 것은 나에게 배운 것이기 때문이다.'('all the discords that arose between Pope Julius and me were owing to the envy of Bramante and Raphael of Urbino; and this is the reason why he did not proceed with the tomb in his lifetime, in order to ruin me. And Raphael had good reason to be envious, since what he knew of art he learned from me.'), 참고: The Life of Michelangelo, Hellmut Wohl, 1999 [[https://books.google.co.kr/books?id=sWNZ7njz2MkC&pg=PA133&lpg=PA133&dq=all+the+discords+that+arose+between+Pope+Julius+and+me+were+owing+to+the+envy+of+Bramante+and+Raphael+of+Urbino;+and+this+is+the+reason+why+he+did+not+proceed+with+the+tomb+in+his+lifetime,+in+order+to+ruin+me.+And+Raphael+had+good+reason+to+be+envious,+since+what+he+knew+of+art+he+learned+from+me&source=bl&ots=JqyOe-Gyiw&sig=ACfU3U1dQ7HluUY-9BWd9S6z55-Bm9DKjg&hl=ko&sa=X&ved=2ahUKEwjgxqL2hJWCAxV2rVYBHRP_CUoQ6AF6BAhDEAM#v=onepage&q=all%20the%20discords%20that%20arose%20between%20Pope%20Julius%20and%20me%20were%20owing%20to%20the%20envy%20of%20Bramante%20and%20Raphael%20of%20Urbino%3B%20and%20this%20is%20the%20reason%20why%20he%20did%20not%20proceed%20with%20the%20tomb%20in%20his%20lifetime%2C%20in%20order%20to%20ruin%20me.%20And%20Raphael%20had%20good%20reason%20to%20be%20envious%2C%20since%20what%20he%20knew%20of%20art%20he%20learned%20from%20me&f=false|링크]]]이라며 여전히 의식하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바사리는 라파엘로가 미켈란젤로의 유일한 라이벌이라고 진술했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의 제자이자 친우이다. 그의 '미술가 평전' 저작은 사실상 미켈란젤로를 고대 이래 최고의 작가로 등극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거의 신처럼 숭상했다. 피렌체 산타크로체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무덤 디자인도 바사리가 했다. 그런 그가 라파엘로를 그렇게 평가한 것이다. 미켈란젤로 파트의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나는 누구도 나만큼 미켈란젤로를 잘 알고 그의 충실한 벗이었으며 동시에 순명하는 제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사정을 누구에게나 수긍이 가도록 설명할 수 있다. 그뿐인가. 나보다 더 그분에게 애착을 느끼는 이는 없다고 확신하며, 그분이 내게 보낸 편지의 수보다 더 많은 편지를 받은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진실을 말하고 싶은 나머지 이런 여담을 늘어놓았지만, 이 전기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다.'(바사리, 이근배 옮김, 미술가 평전, 한길사)] 영국 내셔널 갤러리의 라파엘로 소개에서는 '수백년 동안 미켈란젤로에 비해서는 다재다능하고, 레오나르도에 비하여 다작을 남긴 최고의 화가로 여겨져왔다'[* 'For centuries Raphael has been recognised as the supreme High Renaissance painter, more versatile than Michelangelo and more prolific than their older contemporary Leonardo.']고 언급된다. '그리스도의 변용'은 30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유화(most famous oil painting in the world)로 불렸다.[* 1525년에서 1935년까지 이 그림에 대한 분석, 묘사, 경외, 비평이 적어도 229개가 발견된다. 괴테와 [[마크 트웨인]]의 말도 포함되어 있다. 현재는 보다 단순하고 알기 쉬운 [[모나리자]]가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초상화는 물론이고 과거 그림의 위계에서 가장 높이 평가 받는 '역사화'에서도 최고의 모델로 추앙받았다. 18세기 영국 왕립미술학교(Royal academy)의 초대 원장으로 24년 동안 재임하며 영국 미술계를 이끈 화가, 교육가로 작위까지 받았던 조슈아 레이놀즈 경[* Sir Joshua Reynolds, 1723-1792. '아이 사무엘'(The Infant Samuel)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오늘도 무사히' 짤로 유명하다.[[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01203/104261324/1|#]] ]은 라파엘로를 최고로 평가하였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중 누가 더 위냐는 질문이 있고 꼭 답해야 한다면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높은 예술의 질에 누가 도달했는가에 답이 존재하고, 의문의 여지 없이 그것은 라파엘로이다. 다만 롱기누스[* 1세기에 작성된 로마의 그리스 문학 비평작이다. 저자는 미상이며 미학의 효과에 대한 고전으로 여겨진다.]의 의견을 따른다면 인간으로서 미의 부재와 결핍에 대한 속죄, 그리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는 숭고하고 위대한 인간 그 자체로 본다면 미켈란젤로가 우위이다. 이 두 명의 비범한 사람은 이전의 어떤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예술의 최상위 레벨에 도달했으며 이후로도 넘어설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적당한 의역이 들어감을 참고.] > >To the question therefore which ought to hold the first rank, Raffaelle or Michael Angelo, it must be answered that if it is to be given to him, who possessed a greater combination of the higher qualities of the art than any other man there is no doubt but Raffaelle is the first. But if, as Longinus thinks, the sublime, being the highest excellence that human composition can attain to, abundantly compensates the absence of every other beauty, and atones for all other deficiencies, then Michael Angelo demands the preference. These two extraordinary men [i.e. Michelangelo and Raphael] carried some of the higher excellencies of art to a higher degree of perfection than probably they ever achieved before. They have certainly not been excelled or equalled ever since. >- Sir Joshua Reynolds, Discourse 5, 1772[[https://www.lancaster.ac.uk/fass/ruskin/empi/notes/iraph03.htm|링크]] 17세기 말에서 19세기 말까지 200여년 동안 라파엘로의 신성은 그 누구보다 위로 추앙받아왔으나, 20세기에 접어들며 그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 [[라파엘 전파]]가 나오기도 하였으며 예술가의 자의식에 대한 인식 전환도 동반되며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예술가의 모습인 개성 넘치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에 대한 평가가 상승한다.[* 현대인인 우리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더 친숙한데 왜 '라파엘전파'라고 했을지 의문이 들 수 있지만 그 시대까지 200년 동안 최고로 평가 받은 예술가는 라파엘로였다.]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 John Ruskin, 1819-1900]은 라파엘전파에 대해 쓴 글에서 유럽 예술의 파멸이 서명의 방에서 나왔고 쇠퇴는 라파엘로의 탁월함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대가의 영향이 너무 짙게 남아 그를 묵수하는 후대의 문제가 대가 때문이라는 이런 주장은 음악계에도, 심지어 조선에서도 있었다.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와 [[김창흡]]의 시가 그 예이다.] >유럽 예술의 파멸은 그 방(서명의 방)에서 나왔고, 예술의 쇠퇴는 그의 엄청난 탁월함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그의 위대한 작품에서 얻게 된 실행의 완벽성[* 그림의 완벽함]과 형태의 아름다움은 모든 예술가들의 주된 목표가 되었다. 그리하여 후대 예술가들은 생각보다 실행을, 진실성보다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었다...... 중세 예술에서는 생각이 첫째이고 실행이 다음이지만, 현대 예술에서는 실행이 첫째이고 생각이 다음이다. 그리고 중세 예술에서는 진실성이 첫째이고 아름다움은 두번째이지만, 현대 예술에서는 아름다움이 첫째이고 진실성은 두번째이다. 중세 예술의 원리는 라파엘로에게 전해졌고, 현대의 원리는 라파엘로에게서 온 것이다. > >The doom of the arts of Europe went forth from that chamber(the Stanza della Segnatura), and it was brought about in great part by the very excellencies of the man who had thus marked the commencement of decline. The perfection of execution and the beauty of feature which were attained in his works, and in those of his great contemporaries, rendered finish of execution and beauty of form the chief objects of all artists; and thenceforward execution was looked for rather than thought, and beauty rather than veracity...... In mediæval art, thought is the first thing, execution the second; in modern art execution is the first thing, and thought the second. And again, in mediæval art, truth is first, beauty second; in modern art, beauty is first, truth second. The mediæval principles led up to Raphael, and the modern principles lead down from him. >- John Ruskin (1853), Pre-Raphaelitism[* p 127 online at Project Gutenburg Archived 2008-12-26 at the Wayback Machine] 라파엘로는 유년기에 부모를 모두 잃고 계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있지만, 이후의 삶은 그의 초월적인 능력과 성품이 결합하며 실패 한 번 없이 성공만 반복하며 커리어의 절정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갔고 그 절정에서 추락도 없이 갑자기 젊은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에 보통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 결과 현재는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 3 대가 중에서 캐릭터의 개성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게 되며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는 경향이 있다. 또한 미술사학자인 레오폴드와 헬렌 에틀링거[* Leopold and Helen Ettlinger]는 라파엘로의 인기가 이전 시대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미술 도서관이 소장한 영어로 된 문헌의 숫자가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나 레오나르도 그림의 상세한 사진들을 다룬 것이 넘쳐나는 것에 비해서 라파엘로의 작품에 대한 것은 단 몇 권에 불과한 것도 영향이 있다고 진단하였다. 그럼에도 이들이 내린 결론은 '모든 위대한 르네상스 거장 중에서도 라파엘로의 영향이 가장 지속적'이라는 것이다.[* 'of all the great Renaissance masters, Raphael's influence is the most continuous.' - Ettlinger, Leopold D., and Helen S. Ettlinger, Raphael, Oxford: Phaidon, 1987, ISBN 0714823031] 결국 현재 라파엘로의 명성은 전적으로 그가 남긴 작품 그 자체에 대한 평가에 근거한 것이며 얼마나 그의 결과물이 뛰어난지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와 함께 바티칸을 대표하는 예술가로서 바티칸 박물관 입구 위에 나란히 조각되어 있다. 미켈란젤로가 바티칸에 [[피에타]]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남겼다면, 라파엘로는 '라파엘로의 방(Raphael Rooms)'이라고 불리는 교황의 집무실, 회의실인 '''서명의 방, 엘리오도로의 방, 보르고 화재의 방,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방''' 4곳[* 가장 마지막에 장식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방은 라파엘로가 사망한 후 그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제자들에 의해 완성된다. 미켈란젤로가 미완성이던 방을 자신이 마무리하겠다며 뛰어들었으나 줄리오 로마노가 페리노 델 바가와 함께 작업을 훌륭하게 마무리해냈다.]에 벽화[* 방의 사면에 모두 벽화가 있다.]와 천장화를 남겼으며[* 25-26세에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 착수해 완성하였다.][[https://m.museivaticani.va/content/museivaticani-mobile/en/collezioni/musei/stanze-di-raffaello/tour-virtuale.html|바티칸 박물관 공식 버추얼 투어]] '''시스티나 예배당의 초대형 태피스트리''' 10점의 밑그림을 그렸다.[* 태피스트리는 피나코테카에 전시되어 있으며, 중요한 행사가 열리면 원래 있던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옮겨진다. 밑그림은 7개가 남아 있으며 영국 왕실 소유로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에 있다. 밑그림은 태피스트리에 비해 당연하게도 풍부한 색감과 디테일을 자랑한다. '라파엘 코트'로 독립되어 전시되고 있다.[[https://www.vam.ac.uk/articles/story-of-the-raphael-cartoons#slideshow=5239394909&slide=0|링크]]] 여기에 더해 제대화 3개('''그리스도의 변용''', 폴리뇨의 성모, 오디 제단화)를 포함한 여러 그림들도 피나코테카에 전시되어 있다. 바티칸 외에도 우피치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영국 내셔널 갤러리, 프라도 미술관,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세계 각국의 유명 미술관들은 그의 작품을 확보하여 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내세우고 있다. 건축가로서의 라파엘로는 수백년 동안 저평가 받아왔으나 1980년대 이후 재평가되고 있다. 라파엘로는 회화적 재능을 배경으로 하는 건축가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며[* 로마 고전주의를 바탕으로 투시도 효과를 이용하여 공간을 회화적으로 처리하고, 매너리즘의 전조 경향으로 회화 장식주의를 통해 표현함.] 1512년에 로마의 '''키지 예배당'''을 설계한 것이 첫 작품이다. 바티칸 궁의 레오 10세 로지아[* '라파엘로 로지아'라고도 불린다.]와 비비에나 추기경의 아파트를 만들고 그의 욕실도 장식해주었다. 로마의 '''빌라 마다마'''는 마지막 작품이며 완성하지 못했다. 연속 공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선보여 매너리즘의 또 다른 효시가 되었다.[* 참고: 임석재, 한 권으로 읽는 임석재의 서양건축사] 라파엘로는 또한 1514년 브라만테 사후에 그의 뒤를 이어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의 책임자가 되었는데 그의 사후 작업 대부분은 변형되거나 사라졌다.[* 미켈란젤로가 일부 수용했다.] 라파엘로는 성당의 평면을 그리스 십자가에서 라틴 십자가 모양으로 바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